아냐. 당신이 지금 읽어야 할 건 내 글이 아니라 나야. 나를 읽어줘. 한 글자 한 글자. 낱낱의 자모까지 나를 발음해줘. 이건 부탁이 아니야. 그렇다고 명령도 아니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이미 오래 전부터 운명이었으니까. 읽혀야만하는 문자였으니까.

나라는 문자

나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버리고 평범한 이름을 택한 여인을 안다. 이름이 주는 고통을 여인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허나 좀 더 아픈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것이 내 오랜 바람이었다. 마음 같아선 여인의 아이가 되어 그 이름을 내가 물려받고 싶었다.

여인의 이름

모든 애인은 남의 애인이지. 빼았기지도 빼았지도 않았지.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애인은 돌려쓰는 거니까. 어제의 애인과 키스하고 돌아온 오늘의 애인의 입술에 키스한 것을 내일의 애인에게 고백할 필요는 없다네. 어차피 알고 있지. 모든 애인은 남의 애인이지.

세상의 모든 애인

누군가 필요해. 확실히 가까이 사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함께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고 가끔 같이 잠들고 일어나 서로에게 밥을 챙겨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있었으면 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몇 번은. 근데 그게 당신일 수 있을까? 당신일 수... 있을까?

고백120530

친구들은 그녀에게 어장관리를 한다고 타박을 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녀를 조심하자고 진지하게 다짐했다. 하지만 나만은 그녀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리저리 재며 인기를 관리하는 게 아녔다. 단지 철새처럼 그때그때 형편이 좀 더 나아진 남자에게 날아가는 것뿐였다. 그러니 난 강 하류 습지의 조류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계절이 바뀌면 추운 땅에서 바다를 건너올 새처럼 내게로 올 그녀를 기다렸다. 슬프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언젠가 다시 다른 남자에게 날아갈 걸 알았지만 비루하지 않았다. 다만 내 곁에 그들의 곁에 머무는 동안 그녀가 잠시나마 평안할 수 있길 바랐다.

조류학자의 사랑

잠든 그를 바라본다. 그와 나의 잠엔 도무지 둘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쉬이 잠든다. 그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의 바깥에 누워 그저 기다린다. 그가 꿈을 멈추고 나올 때가지. 마침내 잠의 방이 비어 이번엔 내가 들어가 잠들 수 있을 그 새벽을 기다린다.

잠의 방

하면 안 될 말을 무심결에 흘리고 찾아오는 긴 후회 안에서 그 말을 곱씹어보면 하지 못할 말이란 게 참으로 하고 싶었던 그 말임을 문득 깨닫는다. 반대로 하고 싶었던 말, 예를 들어 사랑 따위를 꺼내놓으면 이내 그건 하면 안 될 말로 밝혀지고 만다.

하고 싶었던 말

변할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간다. 패배가 될 기록의 무게를 깨닫는다. 보여줄 수 없는 상처는 왜 거울 앞에서 홀로 빛나는가? 도둑 맞은 열정, 항상 뒤늦었던 고백, 혼자 남겨지는 불안, 비와 함께 쏟아진 자모를 조합해 끝내 당신의 이름 하나를 남긴다. 열두 개의 봄.

열두 개의 봄

몸을 섞는 건 어렵지 않으나 몸을 분리해내는 일은 조금 어렵다. 흥분은 이미 가라앉았고 벌거벗은 몸은 싸늘하기만 하다. 표정을 숨기기에는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눈. 고백의 형식을 빌린 말들이 휴지와 함께 던져져 있다. 왜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가?

la vie ennuye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