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

• 사람이 삶이다. 신영복 사상가

제5강 실천이 없는 이론은 한 발 걸음입니다

사람은 실천 활동을 통해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리성이 검증된다. ‘실천 → 인식 → 재실천 → 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발전한다. 그러므로 실천이 없다는 것은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한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신영복 선생은 실천이 배제된 감옥에서 동료 재소자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을 자신의 목발로 삼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과거의 실천이 죽은 실천이 아니며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실천이란 반드시 극적 구조를 갖추고 있거나 규모가 있는 일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걸어가는 저마다의 모든 걸음걸이가 곧 실천이다. 땅을 박차고 일어서든, 그 위에 무너지고 쓰러지든, 우리는 생명이 부지하는 한 거대한 실천의 대륙 위를 걸어가게 마련이다.

- 진행: 김미화, 강의: 신영복


[한 발 걸음, 낭독: 김미화] 
우리 방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20대의 청년과 가장 느린 50대의 노년이 경주를 하였습니다. 청년은 한 발로 뛰고 노년은 두 발로 뛰는 일견 공평한 경주였습니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50대 노년이 거뜬히 이겼습니다. 한 발과 두 발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케 해준 한판 승부였습니다.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實踐)과 인식(認識)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 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리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이처럼 ‘실천 → 인식 → 재실천 → 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발전합니다.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갑니다.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제가 징역 초년,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는 생각의 녹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생각을 녹슬지 않게 간수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녹을 닦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컨대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어나서 걷고자 할 경우의 허전함, 다리 하나가 없다는 절망은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게 합니다. 징역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일이 책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 주지 않았습니다. 역시 한 발 걸음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인식 → 인식 → 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다른 모든 장애인이 그러하듯이 목발을 짚고 걸어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이었습니다. 목발은 비록 단단하기는 해도 자기의 피가 통하는 생다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두 개의 다리가 줄곧 서로 차질을 빚어 걸음이 더디고, 뒤뚱거리고,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이 어색한 걸음새도 세월이 흐르고 목발에 손때가 묻으면서 그럭저럭 이력(履歷)이 나고 보속(步速)과 맵시(?)가 붙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의 소위 이력이란 것이 제게는 매우 귀중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발이 생다리를 닮아서 이루어진 숙달이 아니라 반대로 생다리가 목발을 배워서 이루어진 숙달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인식이 내가 목발로 삼은 그 경험들의 임자들의 인식을 배우고 그것을 닮아감으로써 비로소 걸음걸이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목발의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다리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사전(事前)에는 반대로 예상했던 것이었던 만큼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징역 동료들의 경험들이 단지 과거의 것으로 화석화되어 있지 않고 현재의 징역 그 자체와 튼튼히 연계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으로 해서 강렬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실천이란 죽은 실천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의 발견은 나의 목발에 피가 통하고 감각이 살아나는 듯한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실천이란 반드시 극적 구조를 갖추고 있거나 규모가 있는 일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걸어가는 저마다의 모든 걸음걸이가 곧 실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땅을 박차고 일어서든, 그 위에 무너지고 쓰러지든 우리는 생명이 부지하는 한 거대한 실천의 대륙 위를 걸어가게 마련입니다. 

3월, 길고 추웠던 겨울이 끝나려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옥담 밑 어느 후미진 곳에 봄은 벌써 작은 풀싹으로 와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떻든 봄은 산 너머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발밑의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영복의 담론] 제5강 - 실천이 없는 이론은 한 발 걸음입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는 조선 숙종 말년 하곡 정제두가 은거한 곳이다. 정제두는 학문을 영달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일색의 허학(虛學)을 결별하고, 경전을 우리의 시각에서 새로이 연구하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는 한편, 인간 존재의 본질을 사색하는 등 다양하고 개방된 학문의 풍토와 정신세계를 이루어냈다. 이후 강화도는 강화학(江華學)의 산실이 되었다. 강화학파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지식인의 자세를 준엄하게 견지하며 인간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학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지식인’은 어떠한가? 진정한 지식인이 있는가? 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공고한 신념,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이다.

- 시대의 스승, 신영복을 말하다: KBS 고민정 아나운서 편

- 진행: 김미화, 강의: 신영복

[신영복의 담론] 제9강 - 떨리는 지남철: 지식인의 참된 자세란?

삶은 사람의 준말입니다. ‘사람’의 분자와 분모를 약분하면 ‘삶’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아픈 상처도 사람이 남기고 가며, 가장 큰 기쁨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신영복 선생의 20년 수형생활 중 독방에 있었던 기간은 대략 5년 정도 된다. 특히 겨울 독방은 선생에게 명상과 철학의 교실이었다. 선생은 그곳에서 여름 내내 쌓인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정리했다. 선생이 늘 이야기하는 ‘관계’의 철학도 겨울 독방의 산물이다. 선생은 독방의 무료를 달래기 위해 평소 자주 사용하는 단어의 연상세계를 조사했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의 배후를 하나하나 점검하는 동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정서적 공감의 원초가 되는 ‘사람’이 연상세계에 없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배제된 관념세계는 참으로 창백한 것이다. 이때부터 선생은 연상세계에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심어 가는 작업을 한다. ‘실업’이란 단어에서 경제학의 원리가 아니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당대 사회의 가장 민중적인 사람들이 사고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어야만 우리의 사상도 당대 사회의 고뇌에 맞닿을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지키는 사람들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나 자신의 삶을 깨닫는 일이다.

- 시대의 스승, 신영복을 말하다: 유시민 작가 편
- 진행: 김미화, 강의: 신영복

[신영복의 담론] 제10강 - 사람의 얼굴

[화답1] 변방에서 담론談論을 담그다
글, 낭독_민호기(목사. 음악가. 대신대학교 교수)
몇 해 전 유럽으로 떠나는 가방을 싸다 평소와 달리 책을 딱 한 권만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책 보다는 풍광을, 사람을, 기억을 더 많이 담아오리란 작은 결단이기도 했는데, ‘단 한 권’으로 한정 짓자마자 가져가고 싶은 책 수 백 권이 머릿속에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선생의 글들은 늘 그렇게 나를 ‘중간자’에 머무르게 한다. 어른과 아이,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 아날로그와 디지털, 보수와 진보, 과거와 미래. 중심과 변방, 그 어딘가에서 양쪽 모두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약관에 선생을 만나 불혹에 이른 지금에야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어떻게 살고 사랑하고 사라져갈지를 말이다.
2015. 6. 3. 민호기

[화답2] 10년 만의 답신
글, 낭독_이창락(책 읽는 라디오 제작진)
정확히 10년 전, 이맘때였던 것 같습니다. 봄의 여운이 이마의 땀과 함께 사라질 때쯤, 동네의 한 서점에서 선생님의 책을 만났습니다. ‘감옥’이라는 단어, 그리고 표지에 그려진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의 사내가, 그 책을 놓지 못하게 했었던 것 같습니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주머니 사정에 그 책을 사들고 살던 곳으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계셨고 저는 고시원에 있었습니다.....선생님께 받았던 수많은 서간과 가르침에 대한 응답으로 이렇게 편지 한 장 쓰는 일은 너무나 면목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문자는 왜소합니다. 이 문자들로 감히 운반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이 편지지 여백에 역력하다고 호소하며 이만 각필하고자 합니다.
2015. 6. 5 이창락 올림
추신: 초여름에 걸맞지 않은 더위가 혹서酷暑의 조짐이라면 이번 여름, 선생님의 건강을 염려해도 될는지요.

[화답] 신영복, 나의 선생님

[한성희의 작가 산책]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의 담론] 제10강 - 사람의 얼굴

Dolbegae79